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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한겨레

칼라스 재판과 볼테르, 그리고 제주 4·3 [유레카]

1762년 3월10일, 프랑스 남부 도시 툴루즈. 64살 노인이 공개 처형장에서 수레바퀴에 결박돼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 속에서 마지막 자비를 호소하고 있었다. 빨리 끝내달라는 애원이었다. 전날 툴루즈 고등법원이 항소심에서도 그의 비속살인 혐의를 유죄로 판결하고 극형을 선고한 바로 다음날이었다. 두시간이나 형틀에 묶인 채 지독한 고통을 견뎌내던 ‘죄인’은 ‘자비로운’ 사형 집행관이 목을 조른 뒤에야 숨이 끊어졌다.

‘반인륜적 살인’ 혐의로 기소된 노인의 이름은 장 칼라스. 포목상을 하던 평범한 시민이었다. 칼라스는 처형에 앞서 심문실로 끌려갔다. 재판부의 주문에 따라 시 행정관과 형리들이 속죄와 구원을 회유하며 혹독한 고문을 했다. 확실한 증거도 자백도 없었다는 방증이었다. 칼라스는 재판 내내 무고함을 호소했지만 소용없었다. 유죄를 인정하면 공범으로 기소된 아내와 두 딸까지 치욕스런 형벌을 받을 게 뻔했다.

앞서 다섯달 전, 칼라스의 집 2층에서 그의 장남 마르크앙투안이 숨진 채 발견됐다. 목에 밧줄 자국이 선명했다. 수사 당국은 자살과 교살 두가지 가능성을 두고 주변인들을 심문했다. 그런데 사태가 엉뚱하게 치닫기 시작했다. 칼라스의 가족은 모두 개신교도(위그노)인데, 장남이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 집안에 종교 갈등이 깊었고, 급기야 아버지가 아들을 살해했을 거란 소문이 급속히 퍼졌다. 툴루즈는 가톨릭 세가 강한 곳이었다. 근거 없는 주장이 그럴싸한 추론이 됐고, 무책임한 추론이 광기 어린 적대감을 타고 사실로 둔갑했다.

진실은 달랐다. 칼라스의 장남은 법학을 공부한 뒤 변호사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당시 프랑스에서 변호사는 가톨릭 신자라야 가능했다. 법조인의 꿈이 좌절된 29살 청년은 방황하며 우울증을 앓던 끝에 자기 목을 매달았다.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계몽사상가 볼테르(1694~1778)는 분개했다. 칼라스 재판과 처형은 이성과 계몽의 시대정신에 반하는, 종교적 맹신과 야만적 형벌 제도의 생생한 사례였다. 볼테르는 칼라스의 유족을 만나 재심 청구를 설득하고 복권에 앞장섰다. 이듬해인 1763년, 그가 노년에 쓴 주저 ‘관용에 대한 논설’(관용론, Traité sur la Tolérance)이 그렇게 나왔다. 맞다, 그 톨레랑스. 원저 제목에는 ‘장 칼라스의 죽음에 붙여’(à l'occasion de la mort de Jean Calas)라는 부제가 달렸다.

볼테르가 말한 관용이 개인 또는 집단의 악행이나 도덕적 일탈, 사회적 불의까지 용인하자는 건 아니었다. 차이(다름)를 인정하지 않는 혐오와 광신이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고, 그들에게서 인격을 거세하는 ‘비인간화'를 거쳐, 폭력과 살상도 정당화하는 야만에 대한 경고였다.

칼라스가 목숨을 빼앗긴 지 꼭 3년 뒤인 1765년 3월, 루이 15세가 소집한 국왕참사회가 열렸다. 심판관 40명은 만장일치로 칼라스와 ‘공범’ 가족 모두의 무죄를 선고하고 국가배상을 결정했다. 종교적 불관용이 한 청년과 가정의 삶을 파괴한 뒤였다.

칼라스의 비극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되풀이되고, 여전히 성찰해야 할 교훈을 준다.

하상복 목포대 교수(철학·정치학)는 최근 저서 ‘칼라스 재판과 볼테르’(후마니타스, 2025)에 이렇게 썼다.

“오랜 시간 가톨릭이 지배해 온 도시에서 위그노로 불린 프랑스 개신교도는 군중의 종교적 편견과 그들과 동일한 심리적 세계에 사로잡힌 법률가들의 사법체계가 결합한 광신의 희생양이 됐다. (…) 18세기 프랑스 개신교도가 그러 했던 것처럼, 20세기 한국에서 ‘빨갱이’들은 인간의 자격을 부여받을 수 없었다. (…) 제주 4·3에서 태동한 그 ‘빨갱이’들은 마땅히 추방하거나 죽여야 한다는 이념의 이디오진크라시는 1960, 70년대의 어두운 터널을 거쳐, 1980년 5·18이라는 야만의 드라마에서 정점에 올랐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 극단의 세계에서 자유롭지 않다.”

곧 ‘제주 4·3’이 다가온다. 벌써 78주년이다. 올해도 제주 산간 곳곳에는 봄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날 테다. 젖먹이 아이부터 엄마와 노인까지, 군경의 총칼에 스러진 수만명 양민의 넋처럼. 희생자와 후손의 절대 다수는 아직 무죄 판결도, 정당한 국가 배상도 받지 못했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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